안녕하세요
통영해양구조단 가족여러분 방갑습니다
나에겐 하루가 48시간 이라고 한다 해도 하루가 부족 할 것입니다
봄 가뭄이 심해 전전긍긍 비를 기다리고 있다 앞전에 비가 시원하게 내림과 동시에 모든 업무는 접어두고 농군으로 들어가 흙을 일구어 거름뿌리고 씨앗뿌리며 땀 뻘뻘 흘리고 있는데 폰이 주인님 문자 왔다고 하도 성화를 부려 확인 하는 순간 통영에 장미빛 미래의 초석을 다듬어 가는 RCE사무국에서 번개라는 단어에 심장이 울렁거리기 시작 다음날은 해양경찰서장님 과 미팅이 있어 겸사겸사 번개에 참석해 보니 전혀 생각지 못한 한번은 인사를 나누어야 할 의외의 사람을 포함 9명이 열띤 토론으로 본인이 속해 있는 단체에 애로사항 추진하는 일 통영에 전반적인 일 아무튼 건설적인 이야기가 수 없이 오고 갔으며 통영해양구조단 대장으로서 많은 이야긴 하였지만 그중요약 RCE위원으로 31개 단체에 대표자가 위원이지만 그 단체에서 급여를 받고 근무 시간에 봉사를 하지만 우리구조단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회비내서 생업을 미루고 순수한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으니 앞으로 해양구조단에 미진한 부분이 있다면 이해해 달라고 하였으며 번개에 주요 핵심은 고박경리생선님의 1주기 추모제 어린날 행사 기타등등 이었으며 아래에 자료는 작년에 추모식 때 촬영하여 여러 포털 싸이트에 올렸던 자료를 다시 올리니 참고 하시고 고박경리선생님의 1주기 추모제에 많이 참관하시기 바랍니다
토지작가 박경리 선생님 5일장 장래식의 모든 것
2007년 7월 폐암 선고를 받은 고 박경리(朴景利)님은(본명 박금이 朴今伊) 고령을 이유로 항암 치료를 거부한 채 투병해오다 2008년4월4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현대아산병원에 입원 산소 호흡기에 의존한 체 치료를 받아오다 5월5일 오후3시경 대하소설 토지의(집필 25년 만에 원고지 4만장 분량 등장인물 700명) 작가인 한국 문단의 거목이신 님이 향년 82세로 별세 하셨으며 우리나라 전통 장례식으로 장지인 통영시 문화마당 추모행사와 충열사에서 노제와 산양읍 미륵산 양지농원 안장식까지 촬영한 생생한 사진을 촬영한 순서대로 올리니 숙연한 마음으로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박경리님은 통영군청에 근무시절 1946년 전매청에 근무 하시던 김행도씨 와 결혼하여 아들딸을 슬하에 두었으나 전쟁으로 인해 남편과 아들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외동딸을 키우며 셋방살이를 전전하면서 집필을 시작하여 많은 역작을 남기고 문단인으로서 우리나라 최초로 노밸문학상 후보에 여러번 올려 졌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별세 하셨으나 나라에서 님에 업적을 영원히 길이기 위해 금관문화훈장을 하사 하셨고 님에 기념관 사업을 당차게 추진 중이고 고인이 안장된 미륵산 양지농원 내 2천여평에 추모공원 사업을 통영시에서 추진 한다고 진의장시장님이 추모사에서 내외 빈과 추모차 오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약속 하셨습니다
추 모 사
지난 5월 6일 서울에서 당신을 문상하고 내려오는 버스의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내 조국, 이 땅의 산과 들은 예전의 그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위대한 공기요, 물이요, 하늘이었습니다.
그림 한 장이 인연이 되어 20년 전, 꼭 이맘때 당신은 처음으로 저를 만나기 위해 하동으로 오셨고, 토지의 무대였던 하동 땅을 처음 밟으셨다 하셨습니다. 그날이후 오늘까지 저는 위대한 스승을 모시게 된 행복을 누렸습니다.
처음 만나던 그날, 왜 통영에 오지 않으시느냐고 물었을 때, 당신의 대답은 내 딸 영주가 말하기를 엄마가 돌아가시게 되면 엄마의 모든 것이 통영으로 내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살아생전에는 고향땅을 찾지 않으시겠다는 뜻을 비쳤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와 주셨고, 그리고 2005년 1월5일 저를 원주로 불러 통영에 묻히시겠다고 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유품을 통영으로 가져가되 그 중 세가지를 소중히 간직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세가지는 재봉틀과 국어사전과 소목장이라 하셨습니다. 재봉틀은 나의 생활이요, 국어사전은 나의 문학이요, 소목장은 나의 예술이라 하셨습니다.
차창으로 보이는 이 아름다운 내 조국 강산이 자랑스럽고 위대하고 새로워 보이는데 저는 왜 자꾸 눈물이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왜 자꾸 눈물이 나오지요, 대답 좀 해 주십시오.
흐르는 강물 위로 하얀 새들이 날고 있는 풍경이 보입니다.
저런 생명들의 배고픔마저 걱정해 주시던 당신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내 밥보다 들 고양이 밥을 먼저 챙겨 주신다는 당신은 이제 그 자리에 없습니다.
아침마다 당신을 기다리는 들 고양이들은 언제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온갖 생명들이 태어나는 이 신록의 계절에 당신은 토지 속으로 묻히기 위해 이곳으로 오셨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선생님과 마지막 고별을 위해 와주신 고마운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박완서 장의 위원장님을 비롯한 수많은 문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이십 수년간 선생님을 잘 보살펴 주신 원주시민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토지의 무대 평사리 를 잘 가꾸신 하동 군민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을 위대한 작가가 되도록 교육시켜 준 진주여고에 감사드립니다.
평생 어머님을 잘 모신 딸 영주님과 사위 김지하시인님께도 감사와 위로의 인사를 드립니다.
통영시민 여러분!
선생님 한 분으로 인하여 우리 통영은 얼마나 자랑스런 도시가 되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태까지 박경리 선생을 자랑할줄만 알았지 제대로 기념사업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기야 선생님께서도 당신 살아생전에 기념사업 하는 것을 극구 반대해 오셨습니다.
지금 충렬사 앞 명정동에 조성하고 있는 기념관과 선생님의 묘지가 훌륭한 공원이 되도록 우리 다 같이 힘을 모읍시다.
이번 선생님의 타계로 문화의 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윤이상의 기념사업은 물론 동랑 유치진, 청마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등 통영이 배출한 수많은 거장들의 흔적을 하나하나 통영땅 위에 그 자랑스러움을 펼치도록 합시다.
그리고 詩 부문에 수여하고 있는 청마 문학상처럼, 소설 부문에서도 박경리 문학상을 제정하여 고인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개최하도록 합시다.
이 문제에 관하여 고인이 살아계실 때 수차례 건의를 하였습니다만 거절하시고 사후 그러한 기념사업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해 주셨습니다.
하늘만큼의 그리움은 절대 고독을 다스리고 두더지 같이 땅을 파며 창공의 비상을 본다.
선생님 사시는 동안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셨으면 이런 시 구절을 쓰셨습니까.
글 기둥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 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선생님 이제는 자연의 섭리가 그 고삐를 풀어 드렸습니다.
선생님 詩 사마천으로 추모사를 맺습니다.
그대는 사랑의 記億도 없을 것이다.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時間을 앓았을 것이다.
天刑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肉體를 去勢 당하고
人生을 去勢 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眞實을 記錄하려 했는가
선생님!
이제 선생님 살아생전 그토록 오고 싶어 하셨던 고향 땅 통영으로 영원히 오셨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독전소리 저렁저렁하던 한산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 뵈는 양지바른 곳, 선생님이 좋아하셨던 그곳은 노루와 사슴이 쉬었다 가는 좋은 땅, 평화로운 땅입니다.
그곳에서 편안히 잠드소서.
하늘나라의 복을 누리소서.
고이고이 잠드소서.
2008년 5월 9일 통영시장 진의장 삼가 추모사로 맺습니다.
약력보고
우리 통영이 낳은 대문호이신 박경리 선생님의 약력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박경리 선생님께서는 1926년 10월 28일 경남 통영시 문화동 328번지에서 출생하셨으며, 1941년 통영초등학교와 (30회)1946년 진주여고를 졸업하셨습니다.
1955년 김동리의 추천으로 단편 (계산), (흑흑백백)이 현대문학에 실리면서 등단하셨으며 이후 1959년 (표류도), 1962년 (김약국의 딸들), 1964년 (파시), (시장과 전쟁) 등의 장편을 발표하였습니다.
선생님의 가장 대표적인 대하소설 (토지)는 1969년부터 시작하여 1994년 8월15일 전작이 완결되었으며 25년에 걸쳐 원고지 4만장 분량의 대역작으로서 구 한말로부터 8.15조국 광복에 이르기까지 100여년에 걸친 민족사의 변천을 그린 것으로 탈고 전에 이미 한국문학의 걸작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이 작품으로 선생님께서는 한국문학사에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거봉으로 우뚝서게 되었습니다.
2003년 4월 광복 후 50년의 현대사를 그릴 (나비야 청산가자)를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건강악화로 부득이 3회를 끝으로 미완의 작품으로 남겨두게 되었습니다. 이외도 선생님께서는 단편(전도),(불신시대), (벽지), (흑과 콤비의 구두), (하루), (단층), 등이 있으며 장편 (노을 진 들녘 ), (신교수의 부인 ), 과 시집(믓 떠나는 배)와 에세이집 (Q 씨 에게 ) 등이 있습니다.
1995년에는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객원교수로 계시면서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라는 강의 노트를 내기도 하였으며 2003년 생명과 환경의 가치를 설파함을 주목적으로 환경계간지 (숨소리)를 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최근작으로는 2008년 3월에 이르러 현대문학4월호에 “까치설”, “옛날의 그 집 ” 등 세편의 시를 발표한 것이 생전에 마지막 작품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993년 환경운동연합 공동 대표를 역임하셨으며 1996년 연세대학교 석좌교수로 계시면서 토지 문화재단을 창립하여 이사장으로 계셨으며 1999년 원주 치악산 기슭에 토지문화관을 개관하여 문화예술의 길을 걷는 후진 양성을 위하여 애써 오셨습니다.
1957년 현대문학신인상 1965년 한국여류문학상 1972년 월탄문학상과 1991년 인촌문화상을 수상하셨고 이 외도 보관문화훈장, 올해의 여성상, 호암 예술상 등을 수상하셨으며 1999년에는 한국예술평론가협회에서 주최한 20년세기 를 빛낸 예술인에 뽑히기도 하였으며 금번 타계와 더불어 문화예술인의 최고의 영예인 금관문화훈장을 대통령께서 직접 영전에 올리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지난 4월4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현대아산병원에서 가료 중 5월5일 오후 2시 45분에 82세의 일기로 파란 많은 생애를 완성하셨으며 슬하에 외동딸김영주 씨를 두었고 사위로는 김지하 시인이 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부족하지만 선생님에 약력보고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추봉지키미인 나는 산제한 일들 속에 파묻혀 사는데 4~5월은 행사도 많고 가야할 곳도 많아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판 앞으로도 해양구조단 의용소방대 각종행사 기타 등등이 밀려오고 있어 벼룩도 낫짝이 있지 집안일 팽개치고 나가자니 아내님 보기가 쑥스럽지만 근번 박경리 선생님에 마지막 가시는 길에 다녀 와야 한다고 아내님보고 이야기 하니 아내님 새벽에 일어나 밥 챙겨주고 의상 챙겨 구두까지 딲아주어 첫배에 몸을 실어 문화마당에 도착해 보니 태풍수준에 강풍속에 관청에서 추모행사 준비 추모행사 시작이 다가오자 각 언론사 내외 빈 전국에서 추모인파까지 모여들어 북새통속에 유족에 모습이 보이고 추모장에 운구가 도착하여 운구를 모셔두고 여러 가지 한풀이 공연이 이어지고 진의장시장님에 추모사와 김태호 경상남도 도지사님에 추모사 후 모두 다 일어나 묵념한 후 길을 떠나는데 가는 님이 아쉬운지 바람이 길동무 하여 떠났으며 서울서부터 시작된 장래식을 쭉우욱 보아온 타지에서 오신 많은 분들이 통영시가 일사 분란하게 정통 장래식을 잘 치루었다 하셔서 먼길 오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추모행사를 주관하신 통영시청 관계자님에게도 감사하며 특히 강풍속에 몸도 가누기 힘든데 200여개의 만장을 끝까지 들고 계셨던 분들에게 수고 하셨단 말을 끝으로 5일장에 박경리 추모행사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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