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과 함께하는 명사초청 강연 with 법의학자 이호 교수
죽음을 기록하는 일, 삶을 되묻는 시간
Writer_고정화 PD Posted_September 21, 2025
우리는 일상에서 죽음을 자주 마주하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이야기라 생각하거나, 두렵고 무거운 주제라 애써 외면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죽음을 바라보는 순간, 삶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지난 9월 20일, 통영RCE세자트라숲에서는 특별한 시간이 마련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죽음 수업』의 저자이자 법의학자인 이호 교수님이 시민들과 함께 죽음을 이야기하며,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4천 건이 넘는 부검을 통해 우리 사회의 죽음을 기록해온 그는, 차가운 기록 너머 따뜻한 성찰을 전했습니다. 이번 강연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 삶을 되묻는 자리였으며, 시민 모두가 자신과 사회를 함께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삶과 죽음,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
죽음을 단순히 개인의 끝이 아닌, 공동체가 함께 바라봐야 할 문제로 이야기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한 사람의 사라짐으로만 여긴다면, 남겨진 이들의 삶도 온전히 안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는 “억울함 없는 죽음”을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사고나 비극을 피하자는 의미가 아니라, 누구도 홀로 외면당하지 않는 죽음을 뜻합니다.
사회적 참사 속에서 우리는 종종 책임을 누군가의 잘못으로만 돌리려 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진정한 변화는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우리”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서로의 삶을 지켜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누군가의 죽음을 내 일처럼 마음에 담을 때, 비로소 억울함 없는 죽음과 더 안전한 공동체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죽음을 기록하는 사람들
법의학의 역할이 단순히 ‘죽은 사람의 사인 규명’에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도 소개되었습니다. 아동 학대, 가정 폭력, 성폭력 사건처럼 살아 있는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 역시 법의학이 다루는 중요한 영역입니다. 교수님은 실제 사례를 들려주었습니다. 절단된 손가락에서 범인을 찾아낸 사건, 치아 자국을 통해 성폭행을 입증한 사건 등은 법의학이 단순한 과학을 넘어 정의와 인권의 최후 보루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법의학자뿐만 아니라 검시관, 법의 간호사, CSI 전문가 등 다양한 전문 인력이 함께할 때 비로소 사회의 진실을 제대로 기록할 수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공감과 배려, 안전한 사회의 토대
교수님은 공감이야말로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함께 울고 기억하는 마음이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공감이 사라질 때 사회는 병들고, 침묵하는 선한 사람들로 인해 더 큰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말은 우리 사회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그는 “사람은 누구나 실수한다”는 말로 안전의 본질을 짚었습니다. 실수를 탓하기보다 예방과 시스템으로 보완하는 사회가 필요하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삶의 마지막을 기록하는 법의학자의 자리에서, 그는 끝내 관계와 배려의 소중함을 이야기했습니다. 작은 사랑과 배려가 모일 때, 우리는 더 안전하고 따뜻한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남겨진 질문, 이어질 배움
강연의 마지막은 철학적 성찰로 이어졌습니다.
“태어나기 전과 죽은 뒤의 무한한 시간 앞에서 우리의 삶은 찰나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찰나에 서로 만나고 스쳐간다는 건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이번 강연은 단순한 지식 나눔을 넘어, 삶과 죽음의 의미를 함께 묻고 성찰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죽음을 기록하는 한 법의학자의 목소리는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되었고, 시민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습니다.
통영RCE세자트라숲은 앞으로도 시민들과 함께할 인문학적 만남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길 위에서, 또 한 번의 소중한 인연을 기다립니다.